누군가가 그랬다. 수구의 몸짓은 기회주의로 나타난다고. 몸의 때는 벗기지 않고 날씨 따라 기후 따라 옷만 갈아입는단다. 결코 알몸을 보이지 않은 채 상황 따라 옷의 형과 색만 달리 한단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중앙일보의 정운경 화백은 높이 살 만하다. 정화백은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 오히려 윗통을 벗어제친다. 몇 가지 사안에 관해서 정화백은 일관되게 ‘옷벗
영화 얘기부터 해야겠다. 앞좌석의 뒤통수가 짜증 나서, 스크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쌍쌍의 스킨십이 부담스러워 영화관을 등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영화 얘기를 한다는 게 못내 쑥스럽다. 집앞 비디오점에서 한편 고를라치면 어김없이 액션만 꺼내 드는 단순무식한 사람으로서 영화 얘기를 한다는 건 더욱 민망스런 일이다. 그래도 해야겠다. 딱히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도둑질이 미덕이 되는 곳이 야구장이라면, 왜곡이 권장되는 곳은 시사만화가 뛰노는 네모 칸이다. 포마드 기름 바른 머리에 곧게 뻗은 양복 주름으로 포장된 ‘높으신 분들’의 ‘스타일’이 마구 뭉개지는 걸 어디서 보겠는가. 가끔 가십란을 통해 육두문자와 몸싸움으로 버무려진 정치인들의 초상화가 등장하긴 하지만 너무 제한적이다. 그들이 우리네 일상사에 끼어드는 빈도
제2차 농민대회를 보며 ‘왈순아지매’(12월 8일)가 평하기를 긍정적인 측면이 있단다. 뭐가? 동서갈등을 끝내는데 일조한 게 그렇단다. 근데 ‘왈순아지매’의 표정이 이상하다. 밝은 표정이 아니다. 그냥 무덤덤하다. 말과 표정의 불일치 현상, 이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언뜻 생각만 해도 “동서갈등이 끝났다”는 ‘왈순아지매’의 평이 비정상적이란 건 쉽게 알
요즘 세간에선 ‘느림의 미학’이 인기를 끌고 있다지만 여기선 거꾸로 달리려 한다. 제한된 지면 때문에 ‘느림의 미학’을 구가할 수 없기에 서론은 건너뛰기로 한다. 독자들께서는 밑에 있는 세 개의 만평을 봐 주시기 바란다. 지금 목도하신 대로 이 세 만평은 동일한 소재에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만화적 발상도 거의 동일하다. 이쯤 되면 ‘혹시 누가 표절
국민일보의 심민섭 화백. 우선 그의 고충부터 위로해야겠다. 10개 중앙지 시사만화가 가운데 유일하게 만평과 4컷 만화를 같이 그리는 이가 바로 심화백이다. 다른 만화가가 한 장르에 몰두해 ‘작품’을 고민할 때 심화백은 두 장르를 매일 넘나들며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니 그 고충이 오죽하겠는가. 이 점은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 장르에만 몰두해 창의적인 고
YS의 어록 가운데 그나마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건 뭘까. 필자는 ‘회장론’을 꼽고 싶다. YS는 8월 25일 자신의 상도동 자택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 김정일이 남북 통일정부의 대통령이다. 김대중씨는 총리도 안되고 장관 정도다.…회사 같으면 김정일은 회장이고, (김대통령은) 사장도 아니고 전무도 안 되는 것 같다.”Y
우리 신문을 보노라면 자주 발견하는 현상이 있다. 바로 이중잣대 문제다. 유사한 두 사안에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미는 경우를 심심지 않게, 아니 지겹게 보곤 한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철학 부재 탓이라고 하고, 다른 이는 기회주의 속성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신문의 이런 보도행태는 최근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박정희 흉상 강제철거에 대한 보도태도가 그것이
이젠 정식으로 물어야겠다. 대상은 중앙일보의 김상택 화백이다. 물음의 요지는 이런 것이다. 언론과 권력, 언론과 선거의 상관관계에 대한 김화백의 견해는 어떤 것인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10월 31일자 ‘김상택 만화세상’ 때문이다. 김화백은 이 만화에서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가 엘 고어를 지지한 것을 소재로 삼아 두 가지 메시지를 던졌다.
때때로 회의에 빠진다. 혹시 뱀다리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 눈 멀쩡하고, 상식 건전하면 누구나 보고 감상할 수 있는 게 시사만화이거늘 뭐 하러 이리 주절댈까 하는 회의가 들곤 한다. 그래도 위안으로 삼았던 건 가끔씩 퍼즐 맞춰가듯 행간을 읽고 이미지를 조합하는 과정이 썩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의미에서 회의가 밀려올 때도 있다. 지금
김영삼 씨가 누군가와 러브호텔로 간다. 마침 그 앞에서 러브호텔 반대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이 온갖 야유를 퍼붓고 김씨가 타고온 승용차 번호판을 찍는다. 그가 들어간 뒤에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한다. 보다 못한 러브호텔 주인 또는 종업원이 나와 그만 돌아가 줄 것을 요청하지만 주민들은 막무가내다. 만약 이런 상황이 연출된다면 조선일보는 뭐라고 보도할까? 김씨
선문답처럼 오묘한 말의 예술이 있을까. 뜻은 있으나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듣는 이의 상상력을 맘껏 자극하는 선문답. 하지만 쉽게 문을 열지 않는다. 듣는 이는 열심히 두뇌노동을 하며 해답을 찾아보지만 돌아오는 건 염화시중의 미소뿐이다. 그 오랜 두뇌노동이 끝나고 비로소 해독에 성공했을 때의 맘. 아마도 도선비기를 해독하고 난 뒤의 왕건의 마음 같을 게다. 산
IMF 이후 사행심이 점증하고 있는 마당에 필자마저 한몫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빈곤한 상상력 갖고 다른 예를 찾기 힘들기에 그냥 밀어붙여 보련다. ‘한끗 차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이 어디서 연유됐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화투판, 특히 ‘섰다판’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섰다판’에서 ‘한끗 차이’가 얼마나 중대한 결과를
인간의 생명이 존귀하다는 사실은 논증이 필요없는 진리이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 정당성을 갖췄다 해도 그 몸짓이 피의 제단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인류는 주저없이 ‘광란’이라 칭한다. 북한과 미국이 ‘반테러리즘’에 합의했다는 소식에 대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사설에서 ‘발전적인 사태’라며 ‘환영’한 것은 이런 가치관에 터잡고 있다. 두 신문이 아웅산 테
맹목은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준 것 없이 밉다는 데 거기다 대고 ‘왜’를 물어 뭐하겠는가. 그저 그 감정을 받아들일 건지 말지만 정하면 그뿐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 아니겠는가. 물론 그 맹목이 사적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국민여론을 쥐락펴락하는 신문의 경우라면 ‘개인적인 떠남’만으로 해결될 수 없겠지만 여기선 그저 ‘제시’만으로 그치
DJ는 정신이 나갔다. 국민여론은 들을 생각을 안 하고 오로지 남북관계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유가가 오르고 경제가 휘청대는 데도 오매불망 북한뿐이다. 왜 그러느냐고? 노벨 평화상 한번 타보려고 그러는 거지. 누군가가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필자가 국민여론의 말초신경격인 운전기사도 아니고 미용실 아줌마도 아니기에 딱히 뭐라 단정할 수
오랜만에 상큼한 기분으로 글을 쓴다. 늘 ‘씹기’에 매달리다 간만에 ‘칭송’의 태세를 갖추니 이리 편하고 가벼울 수가 없다. 사실 시사만화를 살피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느긋하게 즐기며 감상하는 게 아니라 ‘뭐 껀수 없나’하며 이리저리 뒤적여야 하는 일은, 아무리 생업이라지만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 작업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가끔씩 절로
한국일보의 ‘조삿갓’을 보노라면 종종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삿갓이 너무 큰 거 아닌가? 그래서 눈을 가려버린 것은 아닌가?’ 조부를 참칭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어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조선시대의 김삿갓은 세상을 통찰한 명시를 숱하게 남겼건만 조삿갓에선 통찰의 흔적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통찰뒤끝의 감상이랄수 있는 통렬함을 공
중앙일보 ‘왈순아지매’(8월21일) 왈, 시시하단다. 뭐가? 아리고 저린 이산의 심정을 표현한 시가 그렇단다. ‘왈순아지매’의 말에 해석을 단다면 이런 게 된다. 이산상봉은 아리고 저린데 그걸 묘사한 시는 시시하다. 그래서 시를 쓴 시인들의 소양도 문제있고, 그런 시시한 시를 게재한 신문 편집자도 문제가 있다. 난 이 지점에서 탄복한다. 이 얼마나 과감하고
동아일보의 손문상 화백. 그는 고집쟁이다. 한국일보에서 4컷 만화 ‘강다리’를 그리며 ‘잘나가던’ 그가 홀연히 사표를 던진 것도 그놈의 고집 때문이다. 오로지 한컷짜리 만평을 그려야겠다는 고집이 스스로 ‘백수’의 길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그가 동아일보에서 만평작가로 똬리를 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드디어 그 고집이 뭔가를 일